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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족 고희연 . 난 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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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택용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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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족 제주 여행기

고희기념 제주여행

밤새 여행 출발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잠을 설쳤다. 새벽 5시에 알람이 울리고 부랴부랴 씻고 동생들과 시골에 전화를 해서 출발을 확인했다. 깊은 잠에 빠진 딸아이들도 깨우자마자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김포공항에 차를 주차시키고 우리보다 먼저 왔던 성주네와 합류했다. 07시 20분 발 제주행 한성항공에 탑승했다. 일가친척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비행기 이륙이었다. 비행기 탑승에 대한 기억이 새로운 혜주와 처음 비행경험을 한 혜강이.. 그리고 성주, 윤주, 경현이도 신나고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곽지해수욕장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15인승 승합차를 렌트했고, 짐을 실고 해안도로를 따라 돌았다. 우리가 맨 처음 간 곳은 곽지해수욕장이었다. 백사장이란 말이 실감났다. 하얀 색깔의 모래는 푸른 비취빛의 바다 빛깔 때문에 더욱 하했다.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가 접한 해안선을 따라 미역 해초가 몰려들어와 있었다. 선희는 해초를 건지는 아이들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었고, 아내는 싱그런 바다 냄새를 즐기고 있었다. 이 신선함과 상큼함을 맛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집을 나서고 먼 곳의 이국적인 경치를 찾는가 보다. 이것이 여행이다.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새로움의 유입이고 신선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여행은 설레임이고, 기대감이며, 들뜸이고 채움이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는 우리 가족도 제주도에서 함께 관광을 하고,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가족단위 고희연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난드르 통나무펜션에서 가족기념 고희연
제주도 남단 바닷가에 위치한 난드르 통나무집으로 우리 가족은 이동했다. 봉고한대와 승용차에 분승하여 부모님과 상호삼춘 그리고 우리 4형제와 손자들이 펜션에 도착했다. 바닷가 시골에 알프스풍의 3층 통나무 집이 얼핏 보기에도 우리가 이틀 동안 묵을 집이었다. 밖에서 그 펜션을 쳐다보기만 해도 즐거운 여행과 가족연이 시작될 예감이 들었다. 난드르 통나무 집 주인인 부부가 나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우리들 짐까지 2층으로 운반해주었다. 5개 정도의 다양한 평수로 이루진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부부는 얼핏 보기에도 정감이 넘쳐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번 우리는 펜션예약을 잘했음을 확신했다. 우리가 예약한 집은 48평형으로서 1층은 주인이 사용하고 있었고, 2층과 3층을 손님들에게 내주고 있었다.
고희연 무대준비
나는 이번 아버지 고희연을 치루기 위해서 영농일기를 책으로 묶는 작업과 제주도 가족잔치 행사를 계획하여 실행에 옮겼다. 영농일기는 『농촌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출간을 해서 진즉에 시골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전달했다. 사실 아내와 나는 그 책을 인쇄소에서 가지고 나올 때부터 커다란 기쁨을 서로 공유하였고, 부모님들과 형제들, 특히 막내 고모와 큰 고모님들도 너무나 좋아하셨다. 따라서 이『농촌의 하루』는 이번 제주도 여행의 맛을 더욱더 빛나게 만드는 식욕촉진제 역할을 단단히 했다.
고희연을 진정한 가족잔치로 만들기 위해서는 행사전반에 대한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제주도를 출발하기 전부터 행사와 관련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가족잔치가 패밀리리츄월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는 포말 디너파티의 격식과 양식을 구비하는게 좋다고 판단했고, 행사 식순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그리고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해 온 사진자료와 영상으로 본 우리 가족사를 행사에 넣었다. 노트북 컴퓨터와 빔프로젝터도 준비했고, 인천 집에 있는 오디오스테레오를 포함하여 커다란 스피커까지 비행기로 공수했다.
난드르통나무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큰매제와 함께 2층 거실에 기념행사 무대를 설치했다. 무대전면 벽에는 스크린을 설치하고 가져간 영상장비 및 컴퓨터와 오디오를 세팅했다. 화려한 가족잔치가 개막될 것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어 갔다.
예상치 못한 장비고장
힘들게 가지고 간 오디오스테레오를 조립하여 전원을 켰다. 아! 그런데 오디오 전원이 켜자마자 꺼져버린게 아닌가! 심상치 않은 사태다. 그동안 준비해 온 모든 것이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었다. 오디오를 손으로 쾅쾅 치고 두드렸지만 작동될리 만무했다. 비행기로 이동 중 어딘가가 손상된게 틀림없었다. 모든 기념행사가 오디오 사운드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이 작동되지 않으면 행사는 개최할 수가 없었다. 참담한 마음이었다. 그 시간 그 곳에서 다른 대체수단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행사를 연기하기에는 기대감에 젖어있는 가족들보다도 내 자신의 실망감이 더 컸다. 급기야 매제가 오디오를 분해해보았지만 도루아미 타불이 되었다. 우리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 모든 걸 포기했다. 씁쓸한 술잔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은 행사준비였는데 오디오 전원하나가 모든걸 포기할 수 밖에 없도록 했는가를 생각하니 울화도 치밀어 올랐다.

환호와 탄성
모든걸 포기하고 행사를 위해 가져온 오디오 장비를 뒤로 한 채 음식이 준비된 좌탁에 둘러 앉았다. 마음을 비우니 위로와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택원 동생이 오디오를 만지작 거리다 외쳤다. “됐다!” 모두의 시선이 오디오로 쏠렸다. 이보다도 더 큰 기쁨이 있었을까! 환호성을 지르며 나는 행사 시작을 알렸다. 15분 후인 밤 8시부터 진행된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모든 공은 우리 동생에게 돌아가야 마땅했다.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그토록 환희에 찬 환호성이 나왔을까? 행사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가 실현될 수 있고, 그동안 준비한 공력과 노력의 결과를 보여주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그렇게 기뻐했을까? 하여튼 행사가 진행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그것이 너무 좋았다.
고희기념 가족행사
파워포인트로 만들어진 행사 장면의 첫 식순이 화면에 뜨고 궁중제례악으로 준비된 음악이 난드르 통나무집 펜션 거실에 울려 퍼졌다. 분위기 있고 품격 높은 고희연이 시작되었다. 큰매제가 사회를 보았다. 유려한 말솜씨로 좌중을 이끌어 나간 것이 영락없는 메인 MC였다. 식전행사의 서두는 우리 혜강이의 축시로 시작되었다. 이 시는 『농촌의 하루』에 수록된 시였다. 그런데 혜강이가 수줍음을 타서 좀체로 앞에 나가서 읽지를 못했다. 결국에 우리 혜주가 준비한 시를 낭송했다. 이 시는 혜주가 제주도로 출발하기 전 날 밤에 축시를 하나 써야한다면서 쓴 시다.

축시 낭송과 함께 시작된 가족연은 외손자들의 플릇 연주로 완전히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윤주와 경현이는 제주도에서 외할아버지의 고희축하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몇 주일 전부터 피아노학원 과외선생한테 특별 과외를 받아 왔단다. 두 외손자의 플릇 합주는 생생한 현장감을 더해주는 감동의 기쁨을 외할아버지,할머니한테 주었을 뿐만아니라 그날 그곳에 앉아 있는 모든 가족에게 뿌듯함을 심어주었다.
아이들의 축하 연주가 끝나고 이어서 내가 나가서 축사를 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은 축사였다. 해야할 말만 완전히 빼놓고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내로 온 것 같다. 특히 우리형제들이 지금껏 준비해 온 고희연 준비과정과 그 노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해 두고 두고 후회가 된다. 이 부분은 어떤 기회가 되면 내가 분명히 사과하고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하는 대목이다.
나의 축사가 끝나고 손녀들의 축사가 있었다. 외손녀 윤주가 편지를 읽고 손녀 경진이도 밤새 써왔다는 편지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 연회의 주인공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축사에 이어 “경배(慶拜)”가 있었다. 자손들 모두가 부모님한테 큰 절을 올리는 순서를 마련했다. 먼저 4형제 내외가 나란히 절을 올렸고 이어서 손주들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절을 했다. 손주들이 절을 하고 난 후에 나는 소리쳤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절값을 각각 만원씩 주겠습니다. 손주들은 돈을 받을 때가지 절대로 자리를 떠서는 안됩니다!”
모두들 크게 웃었고, 센스 있는 사회자 큰 사위는 예정에 없는 이벤트라면서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자리에 일어나서 방에 가서 손주들 절값을 가지고 와서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함께 즐기고 그 맛을 공유하는게 바로 가족 잔치가 아니겠는가! 어느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되고, 함께 웃고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당초 나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실현되었고 모두에게 만족을 주었다.
경배가 끝나고 케익 커팅을 마련했다. 두 여동생들이 준비한 케이크에 촛불을 점화시키고 축하송을 함게 불렀다. 특히 윤주의 플릇 축하연주는 격조있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케익 커팅과 더불어서 모두가 함께 모여 촬영한 전가족기념사진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즐거운 파티는 계속되었다. 경배가 끝나고 순천 작은아버지의 축사가 이어졌다. 작은아버지는 도저히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형님 때문에 제주도까지 오셨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행사 준비를 총괄한 장남인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 눈물 속에는 작은아버지가 형님을 생각해 왔던 모든 느낌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가족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상념에 젖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축하 공연을 준비했다. 성주와 경현이가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태권도 품새 시범에서 격파까지를 연출했다. 돌려차기로 송판을 멋지게 격파하자 힘찬 박수가 터졌다.
오늘 가족기념행사를 위하여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하이라이트 중에 하이라이트들이 연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수 년 동안 작업을 한 책인『농촌의 하루』를 나와 아내가 부모님께 선물하였다. 그동안에 말없이 도와주었던 아내의 고마움을 생각하며 나는 부모님께 책을 자랑스럽게 헌정했다. 그리고 책과 더불어 내가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인 “영상으로 본 우리가족”의 영상물을 비디오 테이프에 담아 함께 전달했다. 이보다 더 뜻 깊은 고희기념의 선물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갖는 회심의 작품들이다. 한 인간을 중심으로 생성된 가족사와 가족들의 생생한 모습들을 기록하고 영상으로 담은 것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우며 대견한 작품들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우리 부부의 선물증정이 끝나고 작은 아들 부부의 선물증정이 있었다. 우리 4형제들이 뜻을 모아 준비한 어머님 반지였다. 그 반지를 작은 아들 부부가 아버지에게 전달하고, 그걸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직접 끼워주셨다. 오늘날 우리 가족의 시원은 우리부모 두 분이고 그 분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일흔을 맞이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기쁨을 축하하고 선물로서 그 뜻을 전달했으니 ... 우리 가족의 고희연 행사는 그야말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가족의례라 아니할 수 가 없었다.
선물전달이 끝나고 순천 작은 고모의 축시 낭송이 있었다. 영농일기에 집어 넣기 위하여 등단시인인 우리 고모의 축시를 내가 부탁했고 우리 고모가 기꺼이 써주었던 축시였다. 그것을 책에 담고 전화기로 고모가 직접 낭송한 것을 녹음하여 오디오 파일로 변환시켜, 배경음악을 깔아 완정한 형태의 파일로 재생을 시켰다. 시인 자신의 생생한 목소리는 그 목소리의 톤과 음색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감동과 느낌을 전달했다. 내가 컴퓨터 작업시 알지 못했던 고모님
목소리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시의 내용을 차치하고 ‘우리 오빠’라는 호칭을 부르는 고모의 시낭송을 듣고 눈시울에 맺힌 것을 훔치고 계셨다. 한 구절의 시어가 옮겨다 놓은 감정의 화산이 이토록 강렬할 줄이야,,, 그래서 시라는 것이 인간의 언어역사가 시작되고 난후부터 사람을 울려왔나 보다.
축시가 끝나고 우리 아버지 고희기념사가 있었다. 아버지는 한껏 상기된 얼굴과 감정을 절제한 목소리로 기념사를 시작하였다. 아이들 중 누군가가 카리스마 짱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기념사는 청산유수처럼 흘러갔고 그 내용도 좌중을 일순에 숙연하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 아버지가 말씀을 조리있게 그렇게 잘할 줄은 나도 몰랐었다.

모두들 행사가 끝날 줄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든 회심의 영상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없앨 수 있겠는가! 제주도 가족행사의 근간이자 모태가 된 이 영상은 다른 누구보다 내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영상물이었다.
“영화 상영이 있겠습니다. 모두들 앞에 있는 술잔이나 음식을 드시면서 즐겁게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영상을 틀어 놓고 짧게 안내를 했었다. 왁스의 ‘황혼“을 배경음악으로 깔았다. 시골집을 풀삿으로 찍어서 그 사진을 유화처럼 합성한 그림이 화면에 뜨자 일시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최소한 우리 가족들에게는 히트를 친 작품이 된 것이다. 성공적이었다. 영상물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여경이가 부른 ”라징가라“는 이태리 가곡은 내가 만든 영상물의 수준을 최대한 높이 끌어 올렸다. 여경이의 노래를 끝으로 공식적인 행사가 끝났다. 우리 자녀와 자손들이 가족고희기념 행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100프로 다했다. 원없는 칠순 잔치를 마쳤다. 그날 밤 우리는 난드르 통나무 집 거실에 둘러 앉아 계속 축배를 들었다. 제주도 최남단 바닷가의 밤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잊지 못할 감미로운 시간이었다. 끝.








우리 아버지 고희잔치 기념 가족 여행을 너무나 감동적으로 치르렀다.

난 지금 난 드르 통나무 집 주인장께 감사드리고 싶다.

그 잔잔한 감동을 기억하고 싶어서 짧은 내 생각의 글을 썼다.

파일로 첨부한다.